'민족의식 실증' 귀중한 사료…미군 특수요원 선발 6인이 주도
본지가 발굴, 창간 40주년 기획으로 5회에 걸쳐 연재 보도한 '자유한인보'에 대해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유한인보'는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 포로가 됐던 2700여명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다. 본지는 '독도 화가'로 유명한 권용섭씨의 부친이 보관하고 있던 진본 4, 5호를 발굴 보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홍선표 책임연구원이 '자유한인보' 발굴 의미를 기고로 보내왔다. [편집자] ------------------------------------------------------------ '자유한인보' 4호와 5호의 진본 발견은 이번 광복절의 의미를 매우 뜻 깊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 자료를 발굴해 보도한 미주중앙일보의 노력과 자료 소장가의 큰 결단에 대해 관련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자유한인보'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잡지 일지 모르나 이미 3호와 7호가 소개되어 있어 비교적 국내 학계에 익히 알려진 자료이다. 그럼에도, 새로 발굴된 '자유한인보' 4호, 5호가 재미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국내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전체 7권 가운데 약 절반 이상이 모아짐으로써 향후 이 자료를 둘러싼 역사적인 성격을 더욱 밝힐 수 있게 된 점이다. 이번 잡지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된 한인들이 해방 후 귀국을 앞두고 자체의 단결을 도모하고 강제 동원의 경험을 토대로 귀국 후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대비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하와이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인들은 크게 징병이나 학병에 의한 동원된 군인과 징용된 군속(노무자)으로 나누어진다. '자유한인보' 의 발간을 주도한 인물은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이다. 이들은 1945년 3~4월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학병 출신 포로들이었다. 미군은 이들 세 명과 사이판에서 일본군 노무자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위스콘신 주 맥코이(McCoy)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이종흥, 김현일, 김필영 등 3명을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납코계획(NAPCO Project)의 요원으로 선발해 침투훈련을 시켰다. 미군이 이들 6명의 포로들을 특별 요원으로 선발한 것은 한인 포로들 가운데 항일투쟁정신이 매우 뛰어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납코계획은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미 전략첩보국)가 한반도에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공작원을 침투시켜 정보수집, 거점확보, 사보타지 등의 활동을 벌이기 위해 추진한 한반도침투작전이다. 납코계획에 참가한 한인은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을 비롯해 19명이었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박순동 등 3명과 맥코이포로수용소에서 선발된 이종흥 등 3명은 1945년 5월부터 9월까지 샌타카탈리나섬에서 침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이 훈련을 마칠 때쯤 일본의 항복으로 납코계획이 무산되어 박순동 등 6명은 하와이포로수용소로 수용되었다. '자유한인보'가 발행된 때는 박순동 등 6명이 1945년 9월 말 하와이포로수용소로 수용된 직후인 10월 말이었다. 하와이포로수용소를 운영한 미군측은 특수임무를 띠고 군사훈련을 받았던 이들 한인 포로들을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신뢰 속에 박순동, 박명무, 이종실은 수용소 측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 '자유한인보'를 발행하였다. 이처럼 '자유한인보'는 강력한 항일정신을 가진 학병 탈출 포로이자 미군의 특수공작요원으로 한반도 침투훈련을 받은 자들에 의해 발행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이 잡지의 성격이 얼마나 철저한 항일 독립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따라서 새로 발굴된 '자유한인보' 4, 5호는 당시 한인 포로들이 가진 일상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즉, 강제 동원된 이후 생사를 넘나든 숫한 고비 속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일제의 침략 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한인들의 뜨거운 민족의식을 실증하는 귀중한 역사자료라는 점 때문에 이번 자료 발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